[오래된 가게] [끝] 군산시 80여년 된 제과점 '이성당'
빵 구울땐 십여m씩 줄 서… 소풍날엔 차량 몰려 난리
메뉴·실내는 세월따라 변화… 주민 '그래도 추억 서린 곳'

분명 빵집인데, 야채 볶는 냄새가 먼저 났다. 120㎡(40평) 남짓한 빵공장. 한 조리사는 당근과 양파 등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잘게 썰었고, 다른 조리사는 기름 두른 커다란 프라이팬에 야채를 들들 볶았다. 열에 서너번 정도는 그 위에 카레가루를 뿌렸다.

'야채 속을 공장에서 직접 만들면 손이 많이 가요. 다른 빵 세 개 만들 때 야채빵 하나 만드는 꼴이니까…. 하지만 찾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없다'고 할 수가 있어야지.'

지난달 26일 찾아간 전북 군산시의 제과점 '이성당' 사장 김현주(48)씨가 멋쩍게 웃었다. 빵집 한가운데 위치한 계산대 옆엔 시어머니인 전(前) 사장 오남례(75)씨가 간이의자에 앉아 오가는 손님과 텔레비전을 번갈아 보며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었다.

군산 이성당은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선 대부분 사라진, 제대로 된 야채빵과 버터케이크를 지금도 만들고 있는 가장 오래된 빵집이다. 이곳은 일제시대인 1920년대 중반, 군산시청을 마주한 자리에 처음 생겼다. 당시 주인은 일본인이었고, 빵 대신 화과자를 만들었다.


1945년 해방 후 일본인 주인이 떠나자 인근에서 조그만 빵·과자공장을 하던 이석우씨가 가게를 인수했다. 제과점 이름도 '이(李)씨 성(姓)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는 빵집(堂)'이란 뜻에서 '이성당'이라 붙였다.

그 후 이성당 주인의 성(姓)은 3번 더 바뀌었지만, 간판은 바뀌지 않았다. 이씨의 공장 직원이자 이종사촌인 조천영(작고)씨가 사장을 지냈고, 이어 시어머니 오남례씨와 아들 조성용씨 순으로 가게를 맡았다. 며느리 김현주씨는 2003년부터 가게 살림살이를 도맡고 있는 '5대 사장'. 1984년 시집 온 군산토박이 며느리 김씨는 '어렸을 때 여기서 빵만 몇 번 얻어먹었지, 가게를 맡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시어머니 오씨는 '이성당은 군산 사람들의 '만남의 광장'이었다'고 회상한다. 시청 공무원들이 단골 고객이었고, 주민들은 하루 2~4번씩 굽는 이성당 빵을 맛보기 위해 십여m씩 줄을 섰다. 주말이나 아이들 소풍날 아침엔 차가 빵집 앞에서부터 일렬로 쭉 서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1995년, 이성당은 지금의 절반에 불과했던 매장을 330㎡(100여평)까지 넓혔다.

이성당 35년 단골 고객인 이명희(50)씨는 '이성당은 군산에서 제일 유명한 최신 유행 공간이었다'고 했다. 1980년대 초 '모닝서비스'라는 미국식 아침식사(토스트+샐러드+우유 등)를 판매한 것이 대표적인 예. 가격도 싼 편(1500원)이 아니었지만, 손님들은 '이게 뭐냐'고 신기해했다. 1980년대 중반 오씨는 서울에서 직접 '파티셰(제빵 전문가)'를 스카우트해 왔다.


비슷한 역사를 가진 군산 '조아당'이 1997년 IMF로 폐업했을 때도 굳건했던 이성당이었지만, 2000년대 초 위기가 찾아왔다. 며느리 김현주씨는 '어머님이 들으시면 섭섭하시겠지만, 무난한 운영 실적에 안주했던 시기'라고 귀엣말을 했다. 이즈음 이성당 앞에 있던 군산시청이 신시가지로 옮겨가면서 매상도 10%가량 떨어졌다.

앙금 제조 사업에 바쁜 남편 조성용씨 대신 며느리 김씨가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칙칙했던 인테리어를 한층 화사한 주홍색 빛깔로 바꿨고, 파스타·피자 등 8종류의 식사 메뉴도 개발했다. 실내엔 카페테리아 스타일의 의자와 탁자를 갖다놨다.

남편 조씨의 앙금·쌀과자 제조 사업도 이성당의 변신에 큰 도움이 됐다. 남편이 개발한 앙금과 쌀가루가 이성당만의 고유하고 쫄깃한 빵맛을 만들어낸 것.

사람들은 '오래된 그릇도, 오래된 그림도 없지만 여긴 옛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10여년 전엔 '군산초등학교를 다녔다'는 한 일본인 노인이 이성당을 찾아와 한참을 앉아 있었다고 했다. 근처 시장에서 산 먹을거리와 자신이 녹음했다는 노래CD를 놓고 간 노인은 그 후 5년간 매년 이성당에 들렀지만, 이후 발길이 끊어졌다.

하루 손님은 400~500명 내외. 사장 김씨는 '몇몇 손님들이 '아직도 옛 가마에 빵을 굽느냐'고 묻는데, 좀 답답하다'고 했다. '오래된 좋은 전통은 지키고, 바꿀 것은 바꿔야 가게의 역사도 지속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40여명의 이성당 직원들은 일주일에 2~3번씩 직장에서 일본어 수업을 받고, 올여름 4주 과정의 일본 연수도 떠난다. 선진 제빵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다음 이성당 주인은 누구일까. 며느리 김씨는 '아직 모르겠다'면서도 희망적인 답을 꺼냈다. 1남2녀 중 아들과 둘째 딸이 이성당에 관심을 보이며 경영학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 해방 후 65주년을 맞았다는 이성당은 과거와 현재의 바람직한 공존을 보여주고 있었다.